입력 : 2020-05-18 16:23:09
1980년 5.18로부터 40년이 흘렀다. 그 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내 딸이 진즉 대학을 졸업했고, 회갑이 다가오는 중년이 되었다. 내 어머니는 그때 시장에 가다 계엄군의 사각 몽둥이에 맞아 5.18 부상자가 되었고, 얼마 전 5.18 국립묘지에 묻혔다.
어떤 원고 쓸 인연이 닿아 그 열흘을 정리하게 되었다. 많이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로 꿰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27일 새벽 3시,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는 확성기의 목소리, 꼭 그 대목에 이르러 두 번 울었다. 5.18은 열흘로 구성된다. 4.19의 4월19일이 ‘피의 화요일’이듯이, 5.18의 5월18일은 ‘피의 일요일’이다. 그날로 5.18은 촉발된다.
18~20일 잔인한 탄압과 시민의 저항, 21일 계엄군의 집단발포와 민중의 무장, 22~25일 광주, 해방의 시간, 26~27일 최후의 항전. 이렇게 나눠볼 수 있다. 단편소설 절반 정도의 길이여서 SNS에서 읽기에는 다소 길다. 그리고 축약의 한계 등 여러 가지로 부족함이 많지만 구태여 올리는 것은 그날로 부터 40주년이 된 날이기도 하고, 어느 한시라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이기에 이렇게 갈무리해 두는 것이다.
Ⅰ. 항쟁의 배경(18일 이전)
<상략>
계엄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이 초법적인 행태는 바로 이어지는 학살과 저항의 전주곡이었다. 80년 서울의 봄은 이렇게 막을 내렸으며, 그해 광주는 여름도 없이 곧바로 비극의 겨울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가폭력에 저항하여 민중의 힘을 보여준 이 항쟁은 훗날 정의와 평화에 관하여 세계사의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Ⅱ. 항쟁의 촉발(18~20일)
1. 18일, 피의 일요일
18일 아침 전남대에 휴교령이 내려진 와중에 학생들이 학교에 모여들었다. 정문에서 무장한 7공수부대 군인들과 대치하였다. 오전 10시 학생 한명이 폭행을 당하자 “비상계엄 해제하라”, “휴교령을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농성에 들어갔다.
곧바로 경고방송이 울렸고 군인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공격했다. 학생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도망가는 사람들, 심지어 교수에게까지 무차별 폭행이 가해졌다. 학생들은 시내로 향했다. 광주역에 집결한 뒤 공용터미널을 지나 금남로로 향했다. 11시30분 1000여 명이 연좌농성을 시작했다.
전투경찰은 강경진압에 나섰고 오후까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제7공수여단이 오후 3시40분 유동 삼거리에 출현했다. “거리의 사람을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계엄군은 금남로와 충장로를 중심으로 남녀노소 시민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진압봉으로 두들겨 맞고, 군홧발로 짓이겨지고, 대검에 찔리는 충격적인 일들이 속출했다. 거리는 학살과 공포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오후 6시 계림동에서 시위대와 공수부대가 충돌했다. 시위대는 칼, 각목, 파이프 등을 들고 계엄군과 맞섰다.
전남·북 계엄분소는 통행금지 시각이 저녁 12시에서 9시로 앞당겨졌다고 발표했다. 이날 공식 연행자만 405명이었다. 자국의 군인에 의해 자국의 국민이 학살되는 이 충격적인 상황에 모든 언론은 침묵했다.
베타뉴스 이완수 기자 (700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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