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5-25 16:24:51
22일, 항쟁 5일째 되는 날이 밝았다. 밤새 계엄군들이 물러나고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자 사람들은 도청 앞으로 몰려들었다. 모두들 승리감을 만끽하면서도 높은 시민정신을 보여주었다. 거리의 잔해들을 치워내고 깨끗이 청소했다. 이제 시민군을 재편성하고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면서 시내치안을 유지해야 한다.
오전 11시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을 호소했다. 낮 12시30분께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정치인 등 20여명으로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저녁에는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일반수습위는 주로 계엄사 측과의 협상활동을 했으며 학생수습위는 대민업무를 맡았다. 총기수습에 나서 300여정을 수거했다.
오후 3시 서울에서 대학생 500여 명이 광주에 도착해 환영식이 열렸다. 이어 4시께 도청 앞에서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23일, 항쟁 6일째. 외곽지역에서는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려왔다. 오전 10시 도청 앞 광장은 5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해 있었다. 맞은편 상무관에는 시체를 담은 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관이 부족하여 입관 못한 시체들은 무명천에 덮여 있었다.
분향대가 설치되어 향이 피어올랐고, 많은 시민들이 줄지어 분향했다. 이날도 각국 외신기자들의 취재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국내언론보다 외신의 취재영역은 훨씬 자유스럽게 개방되었다. 오후 1시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을 가해 승객 18명중 17명 사망하고 1명만 생존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군은 이때 부상을 당한 2명을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살해했다.
5.18 직후 이곳에 묻혀있던 시신들은 주민의 신고로 발굴된다. 오후 3시 도청 앞에서 범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전역에 살포됐다. 저녁 7시40분 시민 33명이 최초로 석방돼 도청광장에 도착했다.
24일 낮 1시20분 제11공수여단이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을 가해 중학교 1학년 방광범 군이 좌측머리에 총탄을 맞고 숨졌다. 이어 송암동서 퇴각하던 공수부대와 잠복해있던 전교사부대 간의 오인 총격전이 있었다. 군은 이에 대한 화풀이로 마을 수색에 나서 무고한 주민 8명을 총격으로 살해하는 ‘송암동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25일, 항쟁 기간 중 두 번째 일요일이다. 비가 내렸다. 아침 8시 독침사건이 발생했다. 도청 안에 간첩이 침투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뒷날 정보당국의 교란작전이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오전 11시 김수환 추기경의 메시지와 구호대책비 1000만 원이 전달됐다. 오후 3시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고, 오후 5시 재야 민주인사들이 김성용 신부의 수습 안을 논의했으며 4개항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저녁에는 학생수습대책위원들이 범죄발생 예방과 식량공급, 청소문제 등을 논의했다.
항쟁 지도부가 도청을 접수한 22일 이후 광주는 해방의 공간이었다. 공권력이 제거된 상황 속에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회복했다. 매일 아침 길거리를 청소했고, 깨끗해진 거리에서는 솥을 걸고 밥을 지었다. 밤새워 경계근무를 하던 시민군에게 아침을 제공했다. 병원에서 부상자 치료를 위해 혈액 부족을 호소하면 시민들은 팔을 걷고 줄지어 헌혈에 나섰다.
은행이나 신용금고 같은 금융기관에서도 강도 등 강력사건이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금은방은 물론 일반 상점에서도 작은 절도 사건조차 없었다. 이 기간 동안의 범죄율은 평상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았다. 수습위나 시민군들에게 필요한 자금도, 300~400여 명에 이르는 시민군들의 식사도, 시민들의 자발적 성금과 노력으로 해결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자리를 스스로 찾아 지키며 슬픔과 두려움과 침묵 속에서 묵묵히 할 일들을 했다. 시민들은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자치능력을 보여주었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광주의 공동체 정신, 주먹밥으로 상징되는 오월정신은 이처럼 극도의 혼란 속에서도 평온을 유지하며 활짝 꽃피었다.
베타뉴스 이완수 기자 (700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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