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0-11-02 13:27:31
세월을 이기는 장사 없다는 말을 한다. 예전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던 첫사랑이 이제는 평범한 아주머니나 머리가 살짝 벗겨진 아저씨가 되는 그런 것만 아니다. 세월에 가장 약한 것 가운데 하나가 다름 아닌 IT기기다.
사람마다 정의가 다르겠지만 보통 명품이라 하면 세월이 흘러도 그 가치를 잃지 않는 제품을 말한다. 그래서 시계나 가방, 벨트, 향수처럼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도 큰 유행을 타지 않는 그런 제품에 흔히 명품이라는 이름을 붙이곤 한다.
우리가 쓰고 있는 IT기기는 그런 전통적인 명품의 문법에는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지금 쓰고 있는 디자이어라는 스마트폰만 해도 장만한 지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이제 겨우 사용법을 재대로 익히나 싶었는데, 이미 해외에서는 디자이어HD라는 새로운 제품이 등장했다. 당연히 좀 더 넓은 화면, 강력한 처리속도에 다양한 기능을 뽐낸다. 명품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 바로 소비자나 사용자의 절대적인 사랑과 신뢰를 받기 힘들다. 히트상품은 있어도 명품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명품의 속성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설명한 대로 명품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다 쓰는 그런 제품이라 하기는 힘들다. 약간의 희소성이나 고급스러움이 더해지고, 여기에 명품에 어울리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마릴린 먼로는 잠옷 대신 향수를 입고 잤다는 둥의 그런 이야기가 있으면 금상첨화다. 이미 우리 시장에서만 100만대 넘게 팔린 갤럭시S를 2010년 최고의 히트상품이나 가장 많이 팔린 제품으로는 꼽을 수 있을지 몰라도 명품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IT분야에서는 아예 명품은 찾아보기 힘든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아무리 컴퓨터를 바꿔도 키보드만큼은 기계식을 고집하는 이들도 있다. 1987년에 선보였던 IBM의 버클링 방식 키보드는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 지금은 거의 타자기 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여전히 이 제품이나 이와 비슷한 제품이 아니면 못쓰겠다는 열혈 팬을 가지고 있는, 말 그대로 명품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제품이다.
물론 이 키보드에는 지금의 모든 키보드(단 애플은 빼고)에 필수적인 윈도우 키는 없다. 꼭 이 키가 있어야 한다면 이 제품은 명품이 아닌 죽은 제품이다. 하지만 키를 누를 때 나는 특유의 말발굽 소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묘한 중독이 된다. 그 다음은 이른 바 만지는 느낌이 다르다는 점이다. 기계식 키보드답게 요즘 멤브레인 방식 키보드와 달리 키 하나하나에 스프링이 들어 있다. 덕분에 키를 누르는 감촉과 소리가 확연히 다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직도 옥션이나 이베이 같은 경매 사이트에는 아직도 IBM 오리지널 키보드라며 생각보다 무척 비싼 값에 거래되기도 한다. 즉시 구입 100달러 정도에 판매되는 미개봉 제품도 있을 정도다. 참고로 비슷한 생김새의 카피 제품은 5천 원 정도면 용산에서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은 셈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언젠가 IT분야의 박물관 같은 것이 생긴다면 적어도 이 키보드는 전시될 가치가 충분하다. 비록 나중에는 렉스마크로 매각되면서 다른 기계식 키보드와 다를 바 없는 형편없는 제품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며칠 전 벤츠의 관계자가 현대자동차의 엄청난 성장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더 이상 카피전략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경쟁자의 발언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틀린 소리는 아니다. 대중적인 제품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직도 명품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뜻이다. 이른바 하이엔드로 갈수록 마니아층도 두텁고 그 장벽도 높다.
얼마 전부터 삼성이나 LG 역시 세계에서 통하는 IT 명품을 만든다고 많은 투자를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명품이란 단어는 최첨단이나 비싼 값을 가진 제품이란 뜻이기도 하지만, 앞서 설명한 IBM 오리지널 키보드 같은 누구나 인정하는 제품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느껴진다. 소수의 마니아는 물론, 절대 다수의 소비자들로부터 누구나 인정하는 명품을 선보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베타뉴스 김영로 (bear@beta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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