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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만 알던 PC·스마트폰, ‘한글’ 어떻게 깨우쳤을까?


  • 방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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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2-10-09 16:15:05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한글을 쓴다. 그렇지만 요즘엔 한글을 손으로 쓰는 것보다 자판으로 입력하는 것이 더 익숙하다. 손으로 쓰는 것보다 PC나 스마트폰에서 기록하는 것이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20년 전만 해도 PC에서 한글을 쓰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영어만 알아듣던 PC가 어떻게 한글을 깨우치게 됐을까?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PC 속 한글의 발전사, 한글 탄생 566돌을 맞아 되짚어봤다.

     

     

    처음엔 PC에선 한글을 쓸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이 아니었기에 처음부터 그들이 한글을 배려했을 리 만무하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연히 PC에서 한글을 쓰길 원했다. 그러자면 영어 중심으로 구성된 언어 표현 체계를 깨야만 했다.


    한글은 자음 14자와 모음 10자, 모두 24자의 자모로 이루어진다. 각 자모는 초성, 중성, 종성의 조합을 통해 글자로 완성된다. 조합의 수를 모두 따지면 11,172개나 된다.


    한글은 참으로 과학적인 언어지만 이를 디지털로 표현하긴 만만치 않다. 영어의 경우 256개의 문자를 담는 8비트 용량 안에서도 충분히 모든 글자를 표현하고도 남지만 한글의 경우엔 상황이 다르다.


    이러한 불리함을 듣고 1980년 초반 8비트 PC에서 풀어쓰기를 통해 한글을 표현하려는 시도가 시작됐다. ‘안녕’을 ‘ㅇㅏㄴㄴㅕㅇ’과 같은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를 한글 n바이트 조합형이라 부른다. 한글을 구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에 당시 전산학자들은 호환성을 유지하기 위해 한글 풀어쓰기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후 조합형은 3바이트 표현 방식을 거쳐 2바이트 조합형으로 진화를 거듭한다. 2바이트 조합형은 한글 표현을 위해 2바이트(16비트)를 쓰며 첫 번째 비트로 한글 표현 여부를 확인하고 해당 비트를 뺀 나머지 15비트를 5비트씩 나눠 초성, 중성, 종성으로 구현한다.


    조합형은 11,172개의 글자 조합을 모두 쓸 수 있는 것이 장점이었지만 표준 완성형 규격이 나온 이후 삼보의 상용조합형만 명맥을 이었고 이어 윈도우 95가 확장 완성형을 들고 나오면서 완전히 밀려났다.


    당시엔 PC에서 한글을 쓰려면 도깨비, 옴니비전, 한메 한글 등의 한글 카드를 PC 내 ISA 슬롯에 꽂은 다음 전용 램 상주 소프트웨어를 실행해야만 했다. 한글 카드 값도 꽤 비쌌다. 허큘리스 카드에 한글 롬을 적용한 제품도 있었다. 나중엔 소프트웨어만으로 한글 구현이 가능했지만 초기엔 한글을 쓰려면 한글 카드가 필수였다.

     

    ▲ 한글 도깨비 5의 환경 설정 화면


    조합형을 대체한 규격은 완성형이었다. 영문에서 잘 쓰지 않는 조합 대신 한글을 넣어 구현한 방식이다.


    처음 성행한 7비트 완성형의 경우 조합형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1,300여 글자만 표현할 수 있었고 소문자 뒤에 대문자로 쓴 일부 영문이 한글로 표시되는 문제가 있었다. 그렇지만 한글 구현에 필요한 메모리 용량이 적은 덕에 한글 카드 값이 상대적으로 싸서 인기를 끌었다.


    이후 완성형은 2바이트를 통해 총 2,350자의 한글을 표현할 수 있게 됐지만 ‘똠’, ‘홥’ 같은글자는 표현하지 못해 여전히 조합형의 표현력을 넘진 못했다. 대신 국제 표준인 ISO-2022 규격과 호환성이 좋다는 장점을 업고 1987년엔 KSC5601(KS X 1001) 규격이 지정되며 한동안 대세로 자리매김했다.


    1995년 11월 28일 한글 윈도우 95가 나오면서 도스(DOS) 시대가 저물었다. 이와 함께 PC 속 한글 표현 방식도 다시금 변화를 맞게 된다.


    윈도우 95는 확장 완성형(CP949)이라 불리는 자체 한글 표현 방식을 채택했다. 종전 완성형 방식에서 쓸 수 없었던 8,822자를 담는 쾌거를 이뤘지만 대신 닥치는 대로 담은 탓에 글자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효율적인 표현 방식은 아니었지만 윈도우가 대세로 자리매김한 탓에 당시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완성형도, 조합형도 무릎을 꿇었다.


    이후 세계 모든 글자를 표현하기 위해 만든 유니코드가 확장 완성형을 대신하게 됐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IBM 등이 힘을 합쳐 세운 규격이다. 유니코드에선 문자 1개에 넉넉하게 16비트를 할당한 덕에 최대 65,536자를 수용한다. 여기엔 물론 11,172자의 한글도 담겨있다.


    요즘엔 당연하단 것처럼 디지털 기기에서 쓰고 있는 한글, 지금과 같은 기틀이 마련되기까진 꽤 긴 시간과 많은 노력이 있었다. 한글날을 맞아 잠시나마 한글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고마운 마음을 가져보면 어떨까.


    베타뉴스 방일도 (idroom@beta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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